2013년 방명록


  1. 2013년 방명록입니다. 포스트와 무관한 덧글, 링크 신고는 이 곳을 통해주셨으면 합니다.

  2. 죽을만큼 힘들었던 해를 또 보내고, 또 그만큼 힘들 해를 맞이했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복은 오겠지.'라는 일말의 희망도 있다는 것을 전하며 여러분들께도 희망찬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시험을 앞두고, 인사는 카톡과 페북을 통해서 하다보니 블로그는 그냥 가만히 방치할 뻔 했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조금 더 움직일 수 있으려는지……. 여튼, 이하는 작년 방명록과 동일한 내용을 넣습니다.

  3.  본 블로그는 역사(歷史)와 전통 문화예술에 관련된 포스팅이 주로 이루어집니다. 역사 포스팅에 대한 일종의 도구로서 인문 철학 분야의 포스팅도 가끔 있을 수 있지만 지도 편달이 필요합니다.

  4. 본 블로그는 토론을 장려하지만, 속칭 '쿨게이' 성향의 논객들이라거나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은 출입을 삼가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피아간에 정신건강엔 안좋으니까요. 배설은 자기 블로그에서. 덧붙여서 토론과 논쟁을 장려한다고 해서 '반말 찍찍 싸대는' 것까지 장려하진 않습니다. 저는 사람이 좀 못되어서 잘라내는 짓은 못하고, 대신 똑같이 응대합니다. 다만,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되면 덧글을 전면 삭제하고 해당 방문자를 차단하도록 하겠습니다.

  5. 메타블로그 지향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오픈된 개인 공간'으로서 제 블로그의 모든 관리 권한은 저의 자의에 있음을 다시 밝힙니다.

역사학자 시국선언-이라……. 독설毒說


  (다른 쪽은 정치적 문제하고 지나치게 대립될 사람들이 많아 무서워서 여기다가, 지금은 충돌이 제일 무섭다.)

  내가 이 문제를 지나치게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국정원 사태라는 것이 3·15 부정선거에 비견될 만한 일인가 싶다. 물론,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려고 한 정황은 충분히 인지되고, 그것에 대해서 충분히 책임은 져야 한다.문제는 3·15 부정 선거는 아예 투표함에 손을 대었던 조직적 부정선거로써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긴 했지만, 국정원의 이 사건은 투표 당일도 아니고 투표 이전, 일반 사이트도 아니고 진보계열(... 솔직히 엠팍이나 오유를 진보계열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일베가 보수가 아닌 것처럼 이들도 결코 진보는 아니다.) 커뮤니티에서 '반대' 버튼 누르고 댓글 단 것-외에 뭐가 있지? 막말로 여론조작이야 정치권에서도 만연한 것인데다가 일개 커뮤니티에 허위사실을 게제한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내용의 댓글 단게 투표에까지 영향을 미쳤단 말인가? 아무리봐도 이게 시국선언까지 할 문제의 것은 아닌거 같은데…….

  덧) 정상회담 그거는 좀 까여야 하겠다. ㅇㅇ

모 역사 카페에서의 논쟁을 보다가 문득 든 의문 └사부史部


  호흡이 긴 글을 자 안쓰다보니 이젠 영 글 쓰기가 쉽지 않다. 일단, 그래도 좀 뭔가 읽으면 감은 살아나니 그것 때문에라도 요즘엔 읽을만한 역사관련 글들을 좀 읽는 편인데 최근에 모 카페에서 논쟁이 일어난 글들을 보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뭐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고-

  모씨가 촉한(蜀漢)이 익주(益州)의 행정체제를 전부, 후부, 좌부, 우부, 중부의 5부로 나누었다-는 논지의 주장을 했고, 그 근거로 'O부독', '독O부'(O=전, 후, 좌, 우, 중)로 검색되는 정사『삼국지』내의 기사와『삼국회요三國會要』의 몇 글자를 들고 왔다.

  해석이 맞고 안맞고는 일단 차치해 두고서라도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든 것은 '전, 후, 좌, 우'라는 방향 개념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를 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위치가 바뀔 수 있다-고 보는데(때문에 4방장군 가운데 '좌장군'이 상대적으로 상위 권한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일테고), 이 지극히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방향성'이 행정구역명으로 사용될 수 있는가-하는 것이다. 물론, 백제의 수도 5부제에서 '전부와 후부'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좌, 우부가 같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부를 중심으로 전/후부 외에 상부, 하부가 등장하는 것이니 분명히 다른 경우일 것으로 생각된단 말이지. 백제의 5부제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어서 좀 찾아 볼 필요야 있겠는데, 이래저래 행정구역명으로 '전후좌우'가 사용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가는 1人.

13030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관람 후기


  들어가기 전 세글자 요약 : 엉터리.

  오늘, 3.1절을 기념해서 진성당거사님의 주최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답사가 있었습니다. 날이 추워서 본래 예정되어 있었던 후속 답사인 창덕궁-창경궁 일원 답사를 하지 못한 것이 퍽 아쉽습니다. 여하간- 사실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 이미 박물관 취지나 컨셉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컨셉 면에서 그렇게 놀랄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말이야 '멘붕의 답사다!'하고 다녔지만, 실질적으로 저 자신은 그 컨셉 때문에 멘불을 겪진 않은 것 같아요. 다른 무엇보다 일베충과 골수 맑시스트의 성향을 함께 갖고 있는 친구가 주변에 있는 터라 그런 컨셉 따위 그저 넘길 수 있었지요.(야)

  그러나, 그 내용과 전시의 내실에 대해서 알게되고는 엄청난 멘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는 '역사'라는 것이 일제강점기 이전에만 있었다-고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 요즘엔 좀 더 연대를 늦춰서 해방 이전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건물에 대한 설명은 없더군요. 그 자리가 본래 정부정사자리로 필리핀이 지어준 건물이라는 것 정도는 앞에 표지석을 만들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데요. 사실 관련해서 작년 초가을 경에 이순우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 소장이 주최했던 답사도 다녀 왔었지만, 상당히 이력이 복잡해서 지금도 퍽 기억이 쉽지 않은데요- 이래저래 그런게 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간, 이런 감상을 느낄 새도 없이 들어간 전시실은 처음 사진자료가 곁들여진 연표부터 가열찬 디스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캡션이 죄다 개판이었지요. 그 뿐인가요? 전시실 첫번째 장을 보는 동안 한 대여섯개의 장은 보았겠다- 싶을 정도로 아스트랄한 오류의 향연이었습니다. 가령 1887년(... 이 맞았던가요?)의 책들이라고 소개해 놓고는 그때 책은 딱 1권 가져다 놓는 센스라거나 그냥 A4용지에 뜬게 분명한 조악한 복사본들, 사진들은 인용과 복사를 여러번 거친 것을 확대해서 JPG확대시의 계단식 윤곽선이 그대로 보이는 참상에 당장 같은 사진인데 캡션이 달라진다거나 하는 그런 것들이요.

  그 뿐인가요? 만평자료를 인용한 입체형 패널(?)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잘라먹고 있지 않으면, 뻔히 보이는 '조견일로전사지도' 제목을 두고서도 '러일전쟁상황도'라고 써 놓은 경우, 사진 자체도 해독을 못하고-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뮤지엄샵이 있는데 여긴 그냥 국중박과 똑같다고...

  다른 무엇보다 무려 '박물관'인데 학예사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기증된 자료의 전시는 '기증자의 기억에 따라 배치 및 설명'되고 있었다는 거죠. 기증자가 전부 역사학자도 아니고, 사실관계에 있어서의 오류야 누구던 있을 수 있는데 그걸 비판해 줄 학예사가 없는 박물관이라는게 참…. 물론, 현대사는 이제 연구자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하는 입장이니 오죽하겠습니까마는, 우리 학계에는 이미 문헌사만 하는 이들이 판을 치는 형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래저래 뒷목 잡겠더군요.

  이후에는 밥자리와 찻자리를 겸한 난상토론의 장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난상토론까지 참여했다가 요 며칠간의 논스톱 일정으로 인해서 도저히 못버티고 자리를 먼저 떴습니다. 이제사 몸이 추스러지네요.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적은 겁니다.

  오늘 처음 뵈었던 월광토끼 님, 부여님
  오래간만에 존안을 뵐 수 있었던 야스페르츠 님, hyjoon 님, 누군가의 친구 님
  조금 늦게 합류하시어 다행히 멘붕의 장을 겪지 않으신 행인1 님
  마지막으로 모임의 주최차셨던 진성당거사 님까지- 모두 만나뵈어서 반가웠고
  이런 저런 얘기를 통해서 또한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130223 축음기 콘서트 후기 비망록備忘錄


  오래간만의 회동 후기입니다.

  오늘 서울 경희대 앞 콘체르토 카페에서 진성당거사님이 주최하신 축음기 콘서트가 있었습니다. 평소에 SP음반에 조예가 깊으신 진성당거사님께서 보유하고 계신 귀중한 자료를 직접 원음으로 청취할 수 있게끔 해 주셨습니다. 이 글을 빌어 다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제가 영 기억력이 비루하기도 하고 듣는데 집중하다보니 오늘 들은 곡이나 연주자 등을 전체 다 쭉 적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기억나는 대로 적겠습니다.^^

  원 약속 시간보다 약 10여분 먼저 도착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진성당거사님과 회동을 하게 되면 늘 늦었던 터라 평소보다 일찍 나왔더니 좀 낫더군요. 들어가니 막 도착하셔서 준비에 바쁘시더군요. 제가 도착하고 얼마 안있다가 바로 숲속라키님(.. 이 닉네임이 맞으셨던가요? 제가 기억력이 형편 없어서리...)이 도착하셨고, 뒤 이어서 행인1님이 도착하셨습니다. 테스트용으로 틀으셨던 음반을 듣고 뒤이어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가 녹음안 피아노 연주를 들었습니다.(제 기억력이 원체 비루하여 자세한 곡목은 기억할 수 없습니다. ㅠㅠ) 이 연주는 개인적으로 전에 진성당거사님과 몇번 답사를 갔을 때 얻어 들은 적이 있었는데, 확실히 원반이 많이 상한 티가 많이 났습니다. 본래 에디슨 축음기, 그러니까 실린더 형태의 매체에 녹음된 것으로서 개인적으로 주워듣기로는 실린더 형 치고 제대로 남아 있는 음원이 없다고 들었는데 그 악명을 여실히(...) 들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무려 '브람스'가 본인의 곡을 스스로 연주하는 걸 듣다니 오오!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뒤로 들었던 것이 하나 있었고,(편의상 A, 기억이.. ㅠㅠ)제대로 정식으로 듣기 시작한것은 바리톤 마티아 바티스티니(Mattia Battistini, 1856~1928)가 부른 돈죠반니의 아리아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였습니다. 창법 차이를 아주 잘 느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1900년대를 기점으로 성악에서는 발성법, 기악에서는 주법이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성악은 더 드라마틱하고 소리를 죄어서 피치를 아주 높게 치고 올리는 발성을, 기악은 거의 사용되지 않던 비브라토를 사용하는- 그런 변화 말이지요. 성악에 있어서 카루소는 바로 그 '소리를 죄어서 피치를 아주 높이 치고 올리는 드라마틱한 발성'의 선구자라고 할만합니다. 반면 그 이전의 성악가인 A바티스티니는 발성이 굉장히 편안했달까요. 드라마틱하게 치고 가는 느낌이 없어서 자칫 밋밋하게 들릴 정도입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이 음원도 전에 얻어들은 적이 있었던 것으로...)

  이 두 녹음을 들으면서 진성당거사님 曰 "시기의 녹음은 스튜디오라는 개념이 없었을 때라 녹음기구를 들고 호텔방으로 찾아가서 거기서 녹음을 했다." 옛날 녹음 기계들이 결코 작은 부피였을리는 없고 그 무거운걸 들고 ㅎㄷㄷㄷㄷ 호텔방 녹음 에피는 저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ㅎㅎ

  순번이 좀 헛갈리기는 하는데 카루소와 함께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 1850~1905)의 녹음이었습니다. 카루소 직전 시대의 전설적 테너-라고 하지요. 이 음반은 타마뇨가 은퇴하고 노래를 쉬다가 (제가 찾은 정보에 의하면 카루소의 녹음이 절찬리의 인기를 끌자 부랴부랴 녹음을 한 것-이라고 합니다.) 녹음한 겁니다. 거기에 진성당거사님께 듣기로는 당시 타마뇨는 심장병 환자였다고 하는데 그 성량이 그야말로 끝내줍니다. 카루소보다 목을 죄어서 발성하는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발성 자체는 편안하게 들리고, 음색 자체가 본래부터 맑고 깨끗한 느낌입니다.

  진성당거사님 曰 타마뇨는 녹음사상 최초의 로열티 제도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하더군요. 원체 돈독이 오른 양반이라 음반 수익의 일부가 그에게로 돌아가게끔 한 것이지요. 그때 이후로 로열티를 받은 이들이 많았다-라는.

  이 외에 소프라노 한 사람의 음반도 들었었는데, 그리고 성악에서는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스페인 출신의 소프라노 콘치타 수페르비아(Conchita Supervia, 1895~1936)의 녹음이었습니다. 굉장히 비브라토가 많이 들어간 발성이 인상적이었던 것 외에는 기억이 가물 하네요.a 들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걸 다 까먹는지 참... 이렇게 성악곡들을 듣고 있던 와중에 rumic71님도 오셨습니다.

  뒤이어서는 기악을 들었습니다. 초기 녹음에서는 녹음 시설이 기악의 저음역대와 고음역대를 잡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악 녹음은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 가운데에도 간간히 녹음은 했었기 때문에 사리사테가 직접 연주한 지고이네르바이젠 녹음과 같은 것도 남아 있기는 합니다. 오늘 사리사테의 연주로 지고이네르바이젠도 들었는데, 기교 자체도 요즘의 기교와 차이가 있다는 느낌입니다. 속도감고 있고요. 다만, 고음부와 저음부가 상당히 미세하게 들리는 것이 진성당거사님이 말씀하신 녹음 기술의 한계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독주곡은 이렇게 녹음이라도 되었던듯 한에 오케스트라곡은 많이 녹음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이 1920년대 이후, 마이크가 활용되면서 많이 녹음되기 시작했고,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달하여 그 결과 오케스트라 녹음의 가청범위는 1927년 경에 지금과 거의 동일하게 확대되었다고 합니다.

  여튼, 20년대의 기악 녹음 가운데에서는 스토코프스키의 녹음과 토스카니니의 녹음이 기억납니다.(무책임...ㅠㅠ)

  번외로 숲속라키님이 갖고 오신 음반도 들을 수 있었는데요 권명학의 회심곡이었습니다. 저는 이 음반의 연대를 확인할 길이 없어서 다른 분의 후기를 통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 일단 넘어갑니다. 일제 때 회심곡 녹음-이라면 역시 권명학과 하룡남을 들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사실 하룡남은 본래 범패로 더 유명했던 인물이고 회심곡으로 회자된 경우는 잘 알지 못하겠는데, 권명학은 회심곡으로 굉장히 유명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권명학은 성음이 탁한데,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소리를 강제로 끌어 눕혀서 낸다고 묘사할만한 발성을 사용합니다. 조금 더 죄어져 있는 느낌도 강하고요. 하룡남이나 요즈음의 회심곡 창자들이 소리를 둥글게 세워서 흘린다면 권명학은 소리를 강제로 눕혀서 끕니다.

  이 정도까지 듣고 장소에 다른 손님들이 오게되어서 오디오와 관련된 여러가지 잡담을 하다가 식사하러 잠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서는 각종 드립과 난상토론이 이어졌지요. 요사이 제 상황이 상황이라서 저는 주로 학문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었습니다.

  요사이 답답한 일이 많았는데 이 자리를 통해서 조금 숨이 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신 진성당거사님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만 두서없는 후기를 줄입니다. 음악감상회였으므로 음악밸리로 발행합니다.

A카페 사태 비망록備忘錄


  (1) 2011년 3월 28일, A카페에 가입.

  어려서부터 내 별명은 '신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고려인(왜 내 동갑내기+몇년터울의 사람들은 '고려인'이라는 말을 옛날 사람의 대명사처럼 썼는지 모르겠다. 사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단어인데.), 멧돌, 상감(이건 위인전 표지에 나온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는 이유로 붙은 별명이지. 뭐, 위인전 뭐가 있겠나.), 아저씨, 할배 등등등- 거기에 어린시절이 그렇게 밝고 명랑하진 않았으니까 그런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분위기도 밝고 가볍기 보다는 어둡고 우중충하고 무거운 외모를 갖게 되었고.(흐리멍텅하기까지.) 여하간에 그것은 겉모습이 이러했던 이유도 있지만, 원체 옛것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어렸을 때 기성품으로 산 한복을 못입게 되었을 때, 한복 입고 싶다고 떼를 썼고(...), '옛날'과 관련된 책이라면 사족을 못썼고, 게임을 한답시고 하는 건 임진록이 아니면 삼국지, 그리는 그림은 수염달린 대감대가리(...), 이순신에 삼국지는 책이 찢어질 때까지 읽고, 역사책, 위인전만 읽었고, 거기에 한국무용에 소리, 풍물 등등등-

  여하간에, 그런 연장선상으로 '한복'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 아직도 이전번의 연애에서 한복 데이트를 못해본 것이 가장 아쉬울 정도이다. - 입고서 거리 활보는 기본, 갓쓰고 부채까지 들고 활보하기도 했었지. 근데 영 혼자 그러고 있으면 눈초리가 신경 쓰이더라. 원래 대인기피증 비스무리-하게 있는터라 사람 시선 받거나 사진 찍히는걸 썩 좋아하진 않는데(그래서 무대생활하기 무지 힘들었다.) 이게 혼자서 당하니 더 못견딜 지경이겠던 것.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것저것 찾아봤다. 한복입는 모임이나 한복 좋아하는 사람들 모임- 이런 걸. 그러다가 찾게 된것이 '반가의 외출'이라는 사이트였다. 문제는 여긴 상시적이 아니라 명절 중심으로 모이는 정도였고, 내가 찾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다 찾게된 카페 A. 그게 2011년 3월 28일이었다.

  처음에 가입을 하긴 했는데, 별로 있는게 없었다. 몇몇 사람들의 모임 글이 검색되어서 들어간건데 그것 외에는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진다거나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네이버 카페는 거의 단발적 성격이 강하도록 - 꾸준히 운영되는 카페가 10개 중 1개가 채 못될 것다. - 운영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기도 그럴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입했다가 반 실망하고 그저 잠수를 타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로 차츰차츰 회원이 늘더라. 그걸 쭉 관망하다가 2011년 연말을 즈음해서 '공연' 이야기가 나왔었다.

  (2) 2012년 5월, A 카페 공연.

  '한복 알리기'를 주제로 하는 공연이었던 것이다. '공연'이라면야 잔뼈가 굵기도 했고, 이미 그런식으로 한복을 알리는 단체도 있는데, 마냥 그들과 같이 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얼른 나도 참여하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나름대로 모임에도 나가고 했다. 거의 그때를 전후해서 정기 모임이 활성화 되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내 한복이 어떻다 말은 많이 할 수 있을 지언정, 실질적으로 입을 수 있는 자리가 없으면 카페의 존재 이유는 미비히다라고 생각했다. 사람들 모두 마찬가지였고, 때문에 번개, 정기정모는 제법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심지어 6월에는 내가 답사번개와 정모를 진행하기도 했던 정도였다. 여튼, 그런식으로 카페는 점점 커져가고 있던 상황. 5월 이후로 아마 회원의 숫자가 1천명을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헌데 재미있다고 해야 할지, 어이없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 1천명이 넘는 카페에 제대로 된 규정 하나가 없었다. 그나마 있다는건 등업 요건이 전부. 이런 마당이니 상거래 규제도 안되고-

  한복에 대한 정보 공유랍시고 하는 것도 굉장히 주먹구구였다. 해서 이 체계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원래부터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었고, 그나마 입는 사람들 태반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라 카페는 직접 한복을 입는 사람보다도 한복을 짓는 사람, 한복을 입어 볼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 말해서, '한복을 아직 못접해 봤는데 접해볼 예정인' 사람들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카페는 한복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동시에 '한복에 대해서 잘 모르는 이들이 한복을 접하게끔 하는' 전파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그것이 자의던 타의던)

  기왕에 전파의 역할을 할 것이라면, 조금 더 체계적인 한복 전파, 일상 및 보편화를 위한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제법 되었다. '우리라도 입는'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남들에게도 입게끔 할 수 있는' 역할을 해 보자는 것. 그것은 이미 5월 공연 당시의 모토가 '한복을 입고도 얼마든지 현대인으로서의 일상생활을 할 수 있으며, 한복은 결코 스크린 속에서,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것이 아니라 '입는 옷'임을 주장하기 위해서였으니까 당연히 그걸 준비한 카페도 그런 성격을 내포해야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카페는 지속적으로 카페의 존재를 대외적으로 알리려고 노력했는데, 여전히 운영의 모토는 '입는 사람끼리 모여서 히히덕대는 친목카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가입하기 시작했고, 운영진은 거의 패닉상태였다. 온라인에선 엄청나게 증가하던 신입회원 증가율은 오프라인 정모나 번개의 참여율 증가까지 이어지는 적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 정모 한번 나온 사람들 가운데 꾸준히 나오는 사람도 없었다. 결국 '나오는 사람만 나오는 정모'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뿐이랴? 나이 지긋한 회원들은 애초에 '젊은 사람들이 많으니 거기 끼지도 못하고' 점차적으로 모임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회원이 '한복의 일상, 보편화를 위한 사업을 체계적으로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사업'이란 금전적 영리를 얻기 위해 하는 그런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정한 목적과 계획을 두고 짜임새 있게 지속적으로 경영하는 것'으로서의 사업이었다. 뿐인가? 다른 이들도 당시 한복 단체로 쑥쑥 커가던 다른 카페를 의식하면서 그 카페에서 '운영진 모집 공고'를 냈을 때 성토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유로워졌으니 하는 말이지만, 막말로 타 카페에 자기 카페에 '운영진 모집 공고'를 낸 것은 굉장한 실례이긴 하지만, 절차만 잘 갖추었다면, 그 카페와 A카페가 제휴하면서 그곳은 그곳 대로, A는 A대로의 활동을 하면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그건 생각도 않고 "우리가 지네 속국이냐?"식의 발언. 그렇다면 그곳에 맞먹을 정도로 활동하도록 해 보던가. 여튼, 그래서 한 건의는 한달이 가도록 운영진 댓글 하나 달리지 않았다.

  그 비슷한 시기를 즈음해서 내가 A카페에서 게시판 하나를 맡아서 칼럼을 쓰게 되었다. 그래서 게시판 지기가 되니까는 비공개였던 회의실에도 들어가보게 되었지. 헌데 가관. 회의실에 새글 올라온 것은 5월 공연 관련된 것 이외에도 거의 없고, 그나마도 한사람이 올린 것이 대다수. 매니저 글은 올라온지 한참이고, 분명히 운영진이면 회의를 할 터인데 회의에 대한 흔적도 없고, 상거래가 문제 되었을 때에도 부매니저라는 인간이 통보식으로 회의실에 규제규정이랍시고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카페에 공개. 규정 조문에 대한 시비는 누구도 없고. 건의사항에 대해서는 누구도 회의실에는 올려놓은게 없다. 한마디로 그냥 보기만 할 뿐 아무것도 안했다는 소리.

  그런 마당에 건의사항은 계속 빗발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누구도 그 건의사항에 답을 달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정모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내가 진행한 6월 정모는 답사였다. 그것 때문에 나는 이미 알고 있는 덕수궁과 정동길을 카메라까지 들고(뭐 어차피 컴팩트라 무게는 오지게 가벼운거지만) 세번이나 사전답사하고 구조 사진 찍어가고. 헌데 7월 정모는 예상했던 정모장소가 휴관이었더란다. 급작스러운 휴관도 아니고 정기 휴관. 정기 휴관이면 분명히 그 정보를 구할 수 있었을 터이고, 사전답사는 못하더라도 전화 한통이면 확인할 수 있었을 터인데 그건 그냥 정기 휴관. 그리고 8월에는 모 박물관을 갔다는데 거기서는 회원 하나가 "아 정모로 온거 아니에요.^^" 이러고서는 얻어먹을거 다 얻어먹고 돈도 안내고 사라짐. 9월 정모는 무려 회원들로부터 후기에서 '재미없다.' '별로다.'소리까지.

  건의사항한 회원들은 그 사람들대로 불만, 정모 참석 회원들은 그것대로 불만. 거기에 등업이 늦어지기까지 했고, 지역장 스텝들이 고군분투 해도 중앙에서는 그걸 제대로 지원하지 않으니 지역시스템은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고.(경남쪽이나 도와줬단다. 명목은 경남에 사람이 많으니까. 그러고서는 어느쪽에는 '그럼 너네도 사람 많이 확보하던가.'라고 했단다. 대체 이건 뭐하자는 플레이?) MT는 장소나 시간이 전혀 공개되지 않은채로 9월 중순을 넘기고 있었고, 결국 10월에 예정되어 있던 MT는 참여율 저조로 저 하늘로 날아갔지. 근데 이 사실이 전혀 공지되지 않고 원 게시글만 수정해서 폐지를 알렸다. 이것에 대해서 회원 하나가 "폐지된건가요?" 물어보니 부매니저라는 인간이 "잘 못알아보시기에 크게 쓰겠습니다."라고 게시글 맨 상단에 '폐지'라고 크게 쓰고. 이거에 대해서 '백지화 된거면 관련한 공지를 따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회원이 답글 다니 '아 생각하시는 운영진이 아니라서 죄송합니다.'하고 지는 탈퇴해 버렸다.

  매니저? 원래부터 잠수족이었고 번개는 전혀 참석도 안하던 사람에- 건의사항은 엄청나게 쌓였는데 처리 하나 안하고 있고. 그런 사람이었지. 그러다가 부매니저 탈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페 운영 대책 마련해 달라는 사람 앞에 대책은 안세우고 '슬픔과 기쁨이 공존' 운운하면서 아주 감수성 풍부한 공지글 쓰고 또 잠수. 또 뭐라고 하니 이번엔 그냥 사퇴. 그러면서 하는 말은 "나보다 더 잘할 자신이 있는 사람은 연락 주세요." 그리고 무책임하게 잠수.
 
  (3) 새 둥지를 찾으려 하다.

  현명한 새는 제가 둥지틀 곳을 안다고 했던가? 상황이 저 모양이니 매니저 사퇴가 거론되기 전부터 나는 모임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많은 공지를 제기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답은 없으니 갑갑하고. 에라 그럴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다른 모임을 만들자- 싶어서 B카페를 만들었다. 난 이 모든 상황에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았었는데 꼴이 원체 한심하게 돌아가던 터라 나도 가입하게 되었고, 거기서 나름대로 글도 쓰고, 그들과 함게 다른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답도 없고, 의견은 까이기만 하는데 구태여 긁을 필요 있나? 그거 냅두고 다른 활동 하는게 더 답이지. 

  (4) 안녕하세요 사건, A를 살려라.

  그런데, 그러던 와중에 KBS 안녕하세요 사건이 터졌고, 그 사건 해결을 위해 A카페의 회원 하나와 더불어서 각종 글(이라고 쓰고 하소연이라 읽자.)을 외부에 올렸는데, 그것 때문에 또 회원이 하루에만 수십명씩 우루루. 운영진은 공백 상태고 회원은 늘고- 마침내 A카페는 매니저 양도가 진행되었고, 신입회원 처리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흐지부지된 10월 MT를 대체하기 위한 대규모 번개를 개최하기 위해 비대위체제가 출범했지. 나를 비롯한 B의 회원들은 그걸 그대로 봐 줄 수가 없었고, 그 비대위에 참여했다.(난 비대위는 아니었지만.) 번개 장소 선정하고, 번개 작업에 관공서와 협의해서 번개 아주 잘 처리했지. 11월 정모, 12월 정모도 대단히 잘 진행되었다.

  왜 A를 살렸는가? A가 우리 뜻대로 안돌아간다고 해서 그걸 버릴 필요는 없다고 봤거든. A는 A대로의 특징이 있는 거니까. 무엇보다도 A카페와 그 회원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으니까. A 카페의 소속된 사람들도 분명히 중요한 사람들이고 B카페는 그런 사람들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성 짙은 성격으로 형성된 거니까. 어찌보면 분명 서로 다르지만 끈끈한 관계 형성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비대위가 A를 살리고, 그 후속타는 나였다. A의 운영진을 맡은것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없던 카페의 내규를 책임졌다. 문젠 그게 12월이고, 난 그때쯤이면 시험에 정신이 없어야 할 편입준비생이었다는 것. 그래도 내가 하기로 한 것이고, 내가 나름대로 경험이 있기에 도움이 되겠다 싶어 자청한 것이었으니까 후회는 없다. 그렇게 내규를 준비하다가 시험 시즌이 시작되었고, 때문에 내규는 메모만 되어 있을 뿐 정식 문서가 되지 못했다. 그 문서 완성은 1월 5일. 난 그날 단국대 시험을 보러 죽전까지 내려갔고, 죽전에서 집에 도착해 보니 무려 9시였고, 그때 연락을 받아 그 자리에서 메모를 그대로 옮기고 나름대로 내 초안에 대해서 의견 코멘트까지 남기면서 글을 작성해서 보냈다. 무려 45분만에.

  그 내규는 그대로 채택이 되었고, 나름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운영진 업무는 계속했지.

  (5) B카페의 발각(?)

  그 과정을 거치면서도 B는 우리의 활동을 착착 준비해갔다. 공개 카페로 전환하고, 준비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A카페에도 알릴 생각으로. 그랬는데 한 녀석의 눈치 없는(악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이게 A카페에 전해졌다. 어이 없는건 전부다들 "우리는 배신당했어 ㅠㅠ" ... 아니 대체 뭐가 배신이야? B에서 A를 욕하길 했어 부정을 했어? A카페의 주축들이 다른 카페를 세웠다고 뭐 거기를 소흘히 하길 했어? 아니지, 그 전보다도 더 시간 투자해서 카페 기틀까지 만들어 놨더니 분열을 조장한다느니 어쩌고 저쩌고...

  파벌 싸움을 누가 하는지 일러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여하간, 하도 해명들 하라고 해서 연속적으로 해명글을 올렸는데 이번에는 "상처 받았다." 드립과 "해명이 부족하다." 드립. 아니 해명이 부족하면 어떤 측면을 어떻게 해명하라는건지 알려라도 주던가. 무턱대고 그러더니 아예 '너네 걍 나가라.'소리까지. 지들이 지금 누구 때문에 붙어 있는데?!

  결국엔 하다하다 안돼서 탈퇴. 그 결정 내린 A카페 매니저한테 우릴 공격하던 모 회원이 한다는 말. "현명한 탕평이십니다." 아, 그래 탕평이 내쫓는걸 의미하는 거구나.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래 들 안보이게 해줬더니 B에서 첩자질 한 여자는 되돌아가서는 쌍욕을 해대고 앉았고.

  우리가 너네 건드리기 싫어서 다른 곳 만들겠다는데 뭘 그리 문제가 많은지. 막말로 궁금하면 묻던가. '그렇게 친했는데 말한마디 안하고 만들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물어보냐?'라는데 내가 참... 그 뿐이냐? 그들이 우리에게 상처받았다 배신당했다 타령하고 있을 때, 카페에는 계속 신입회원들이 들어오고 심지어 등업요청까지 있었다. 그거 처리 내가 했다. ㄱ- 내가 해명에만 급급했으면 그걸 했겠어? 그 뿐? 그 전에 건의글 쓴거, 그것도 내가 운영진 회의방에 올려서 초안쓰라고 해두기까지.

  해놓고 보니 얼마나 배알이 꼴리던지. 막말로 내돈 들여가면서 답사지 뽑고, 뽑는 정도가 아니라 그 내용들 전부다 내가 새로 쓰고, 그거 다시 자료 올려놓고 목이 터져라 설명하고. 설명해도 누가 물한잔을 줘봤냐. ㄱ- 답사 네 건 진행하면서 내가 니들한테 받은게 없다. 그뿐? 일 있을 때마다 무상으로 달려가서 공연까지. 우리 애들? 내가 심혈 기울여 기른 애들이고 나도 비록 지금은 전공생 아니라 취급 못받기는 하지만 그걸로 페이 받아가면서 프로무대까지 서 본 사람인데 그걸 그냥 공으로 왜 공으로 쳐드시게 했는데? ㄱ-

  (6) 결론 : 지랄도 풍년.

한국엔 익선관이 없는가?(부제 : 이런 사기를 치다니)



  이런 뉴스가 떴다. 첫번째 줄의 내용이 인상적이다. '한국에는 임금이나 황제가 쓰던 익선관이 없습니다.' 정말인가? 박물관에서 언뜻 본것도 같은데? 아닌가? 그럼 그것들은 다 일본이 가져간건가? 저런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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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렇게 얘기가 전개된다면 헛소리.

  생활문화재는 쉽게 전승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려 받아 쓰는 경우도 있고, 상례(喪禮) 혹은 무속적인 이유로 망자의 물건을 태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생활품이라는 것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남기도 어려울 밖에. 때문에 먼 시기의 생활문화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가구나 소품류는 남아 있을 뿐이지 복식 류는 더더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에 그런 것들이 아주 안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직접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의복류와 염습의(殮襲衣)로 사용된 매장 복식, 사찰에 기증된 복장(伏藏) 복식 등 수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관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조선 초나 고려시대의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전후의 유물들이나 18세기, 19세기의 유물 등 다양한 것들이 남아 있다. 익선관? 당연히 있다.

<사진 1, 2> 전(傳) 고종 익선관

  전(傳) 고종 익선관이다. 현재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9년에 중요민속자료 제44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당장 세종대학교 박물관 홈페이지만 둘러보아도 (박물관 홈페이지는 상당히 빈약하지만) 소장유물 가운데 익선관 하나가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물건이다.(클릭 : 사진 상태는 썩 좋지 못하다.) 사진의 출처가 되는『문화재대관 - 중요민속자료 ② 복식·자수편』에는 더불어 이런 설명도 있다.

  익선관은 본 유물 외에도 창덕궁에 3점의 익선관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북청색, 흑색, 자색 각 1점씩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태가 양호한 영왕의 자적색 익선관도 함께 소장되어 있는데 고종의 익선관과 흡사한 형태이다.

<사진 2> 익선관

  현재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옛 창덕궁 보관 익선관 3점을 찾아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현재 찾을 수가 없고, 대신 다른 도록에 실린 사진을 가져왔다.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었다는 익선관이다. 전 고종 익선관보다 상태가 조금 안좋아 보이지만, 그건 도록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넘어가고, 전체적인 형태나 색감 등은 비슷해 보인다.

<사진 4> 영친왕 익선관

  역시 위의 익선관들과 전체적인 형태가 유사하다. 특히 오륜대박물관 소장의 물건과 아주 유사하게 생겼는데, 면사의 상태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지난 2009년 지정된 영친왕의 익선관이다. 영친왕이 누구인가? 주장하는 바대로 따지자면 황사손을 자임하는 이원 씨의 할아버지가 된다. 버젓이 (의붓이긴 하지만) 자기 할아버지의 유물까지 존재하는 익선관이 한국에 없다니? 이걸 포함, 저 위의 오륜대박물관 소장 익선관과 고궁박물관소장 익선관 3기를 개별로 처리하면 무려 6개의 익선관 유물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걸 제하고도 2~3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익선관이 없어? 원 어이가 없어서.

  하긴, 이들의 정신나간 헛소리가 이 뿐이 아니기는 하다.

  황사손을 자칭하는 이원 씨는 어느 매체 인터뷰에서 '살아 있는 궁이 되려면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낙선재에서 외국인과 학생들을 만나 얘기하면 얼마나 생생하겠나?' 라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생생한 해설을 해 줄테니까 내가 낙선재에서 살게끔 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낙선재 활용방안을 문화재청과 이야기 했다는 얘기가 바로 뒤에 나오는 지경이다. 아무리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생활공간은, 주거 공간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생활이 보장되어야 하는 곳이므로 개방할 수가 없다. 왜 순종비 윤씨가, 이방자가, 덕혜옹주가 살았던 시절의 낙선재는 개방되지 못했는가? 당연하다. 그들의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황사손이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영국의 버킹엄 궁전은 영국 군주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지만 7~8월에는 일반인 입장을 허가한다. 그러나 7~8월이면 극히 짧은 기간이며 그 개방 범위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다.(제현들 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문화재에 직접 기거하면서 생생한 역사의 전달-이라니……. 차라리 그러한 의도라면 '감독하게 건물 내부를 직접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와 '문화재 해설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는' 장치를 생각하는게 이성적이다.(무려 이런 사람이 PD출신이다.) '생생한 역사의 설명을 위해 내가 사적 유용하겠다.'니- 이건 말인지 막걸린지.

  아니 애초에 영국까지 갈 것도 없다. 삼청동~안국동 등 북촌 일대에 있는 가옥 가운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몇개 있다. 그 가운데 안국동 윤보선가(정독도서관 가는 길에 있는 바로 그것)에는 아직도 윤보선 대통령의 유족들이 산다고 알고 있다. 때문에 개방을 하지 않는다. 특별 개방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는데 '특별 개방'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의 제정신 아닌 발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환구단 터에 건물이 들어섰으니 복원을 못하고 환구단을 서울광장에 세우려고 했다는 소리. 애초에 '원구단'을 '환구단'이라고 우기는 것은 그렇다 치자. 아니 전제권력의 산물인 대한제국의 환구단을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그것도 '시청 광장'에 재건한다는게 있을 법한 소리인가? 이걸 기득권이 반대한다고? 천만에, 찬성하는 측을 오히려 정신병자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문화재 환수. 소송을 걸겠다 어쩐다- 애초에 유출 문화재의 유출 경로가 확실한게 몇이나 될 것 같은가? 물론 기사 속 투구나 익선관들은 오구라컬렉션의 일부로 보고 있고, 이 컬렉션이 공식적 경로(매매라거나 선물이라거나)가 아닌 비공식적 경로로 유출 된것은 분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재 실태가 어떤가? 있는 문화재도 제대로 관리 못하고 있는 실정에다가 - 10여년 째 '수장고 소장 목록 정리 시작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이라거나 - 유물 관리는 개판 오분전 - 심지어 고종 어진 중 하나는 밑이 울었고, 경기전 제향 때 찢어먹은 태조 어진은 인사동에서 싼맛에 땜질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이 경기전 태조 어진은 대동종약원이 한 짓이구나. 에헤라디야. 에라이... - , 그런데 여기로 들여오자고?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천만에. 민족? 그래 중요하지. 그러나 '문화재'는 문화재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존심의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출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는 어찌 되었던 '매매'와 '증여'라는 방식을 통해 나온 것도 있다. 이 경우는 법적으로 (상당히 분통터지지만) 문제가 거의 없다.(모르지, 난 법학도가 아니라서. 꼬투리 잡으면 나올지도.) 이걸 소송을 하겠다고?

  싫다싫다 하니 이젠 별 기도 안 차는 소리들을 하고 있다. 황사손 이하 대한황실문화원은 제발 정신들 차려라. "아, 우리 황실이 무능력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라고? "고종 황제는 이러한 개혁으로 우리나라를 구하려 하였으나 외세의 핍박으로 실패했다."는 식으로 설명하시는 분들이 누구시더라? 가당찮은 헛소리 말고 제발 '마음에서 우러나는' 반성을 좀 하는 것이 어떤가?



역밸에 뭘 포스팅하고 싶어도- 비망록備忘錄


  이래저래 잠수 타고는 있는데- 역밸에 뭘 포스팅하고 싶어도 모씨가 패악질 부리는 꼴이 보기 싫으니
  언제나 블로그는 개점 휴업이로고.

2012년 방명록


  1. 2012년 방명록입니다. 안부라거나 링크 신고는 이 글을 통해 덧글로 받겠습니다.

  2. 작년 한해는 여러모로 시끌시끌 했었고, 그것이 올해라고 다르지 않을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사실 절망감이 먼저 들긴 하지만, 그래도 작년 보다는 더 나을 거라는 희망 정도는 가질 수 있을리라 봅니다.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 또 오시지 않는 분 모두 작년보다는 좀 더 나은 한해를, 또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오늘을,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보내실 수 있길 바랍니다.

  3. 본 블로그는 역사(歷史)와 전통 문화예술에 관련된 포스팅이 주로 이루어집니다. 역사 포스팅에 대한 일종의 도구로서 인문 철학 분야의 포스팅도 가끔 있을 수 있지만 지도 편달이 필요합니다.

  4. 본 블로그는 토론을 장려하지만, 속칭 '쿨게이' 성향의 논객들이라거나 유사역사학 신봉자들은 출입을 삼가해 주실 것을 청합니다. 피아간에 정신건강엔 안좋으니까요. 배설은 자기 블로그에서. 덧붙여서 토론과 논쟁을 장려한다고 해서 '반말 찍찍 싸대는' 것까지 장려하진 않습니다. 저는 사람이 좀 못되어서 잘라내는 짓은 못하고, 대신 똑같이 응대합니다. 다만,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되면 덧글을 전면 삭제하고 해당 방문자를 차단하도록 하겠습니다.

  5. 메타블로그 지향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오픈된 개인 공간'으로서 제 블로그의 모든 관리 권한은 저의 자의에 있음을 다시 밝힙니다.

역사와 문화를 '만족'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말라. └사부史部

  역사와 문화를 '만족'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 우리는 '극우'가 된다. 결국 이 '만족'의 관점을 어떤 방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탈피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학자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는 느낌이 든다. 문제는 그 빠져나가는 과정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일 것이다. 타인이 내 '만족의 영역'을 건드릴 때, 우리는 누구나 반발하기 때문이다. 논의의 정당성이고 뭐고- 그런거 없이 그저 "왜 내 만족을 건드리냐"에서 시작된 아주 저열한 인신공격만이 시작된다는 얘기다. 

  그것은 한때 환단고기에 빠져있던 나도 그러하였고 지금 유사역사학-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러하다. 

  덕분에 스스로 깨닫기까지 조언자는 오직 '이러하다더라.'를 전달하는 역할 외엔 무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별 수 없이, 내가 할 수 있는말은 이것이다. 당신네들의 논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주체를, 혹은 '고구려'라는 주체를, '고조선'이라는 주체를, '단군'이라는 주체를- 일본과 일본의 신들로 채워넣어봐라. 더 나아가 당신들의 논의에서 '한민족'이라는 단어를 '게르만'으로 바꿔봐라. 얼마나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 나치 시절의 독일과 소름끼치도록 유사한 소리들이 재탕되는지. 

  '사람의 기록'이 바로 역사이고 '사람의 흔적'이 바로 문화다. 그 기록과 흔적에는 어떠한 원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그것은 오직 '삶'의 총체일 뿐이지 '어디서부터 비롯된, 어디에 원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부모에게 나왔다고 해서 내 삶이, 내 역사가 '부모'의 역사가 되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 나의 이 논의는 더욱 심화 될 것이다. 역사학이라기 보다는 역사 철학-에 가까운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이 논의를 끝내지 않고는 우리는 앞으로도 수십년, '민족 자긍심'과 '사실'이라는 지극히 허상적인 주제를 두고 싸움질을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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