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해전(鳴梁海戰) - 승리하기까지 나에겐 아무런 확신도 없었다. └사부史部

1. 조선 수군, 몰락의 길로 들어서다.

[김홍미(金弘微)에게 전교하기를

"이순신(李舜臣)을 잡아 올 때에 선전관(宣傳官)에게 표신(標信)과 밀부(密符)를 주어 보내 잡아오도록 하고, 원균(元均)과 교대한 뒤에 잡아올 것으로 말해 보내라. 또 이순신이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여 있다면 잡아오기에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올 것도 말해 보내라." 하였다.] - 宣祖實錄 85券 선조 30년(1597년 정유/명 만력(萬歷) 25년) 2월 6일(정묘) 3번째 기사

  1597년, 2월 6일, 드디어 왕의 명령이 내려졌다.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 들이라!" 명은 지체없이 시행되었고, 불과 20일 만인 2월 26일, 나는 자리를 박탈 당하고 함거에 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이럴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 시기가 조금 빨랐다면 빨랐다고 할까? 나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이 내려지기 전, 왕은 나를 전라, 충청 통제사로 강등시켰고, 원균을 경상도의 수군 통제사로 삼았다. 불과 14척의 전선을 직속에 둔 이가 그를 제외한 120척의 전선을 가진 나와 동격이 되었다. 명령 체계가 살지 않을 것은 분명한 이치였고, 왕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그냥 놓아 둘 것이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러나 원균은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대장 된 자가 군략은 생각하지 않고 칼과 몸으로 사운다 하니,(1) 필히 병마를 사지에 몰아넣을 인사가 아니겠는가?

  3월에 한성에 도착한 나는 금부에 투옥되었고, 근 한 달여에 달하도록, 고신(苦身)을 받았다. 4월 1일에 출옥을 하고 나서 서애 대감(유성룡)께 들으니, 그 동안 원균은 운주당(이순신이 한산도에 지은 건물로 작전 상황실 역할을 하던 곳 이었다.)에 애첩을 데려와 살면서 주색에 빠져 살았고, 병마들에게 매우 포악하게 굴었다 한다. (2) 서애 대감께서도 나처럼 원균에게 좋은 감정이 없으니 어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야 있겠는가마는, 대체로 원균이 칠천도의 패전 때에 양병(良兵)의 군기를 제대로 수집하지 못한 것이나, 격군(노군)의 수 마저 반으로 격감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아예 없는 소리로 보이지는 않는다. 대저 군기가 그 같은데 무슨 전략이 수립될 것이며, 수립된 전략이나마 제대로 운용할 수 있었겠으며, 장수로부터 병마에 이르기까지 그 누가 앞서서 적과 싸우려 들 수 있었겠는가? 

  균은 당초에 자신이 통제사가 되면 부산으로 나설 것을 말 하였고(3), 나는 육군이 먼저 왜군을 공격, 바다로 몰아 내면 수군이 이를 일망타진 하겠노라 주장하였는데, 정작 통제사가 된 원균은 전장에 나서질 않고, 오히려 나의 전략을 다시 고집한 채,(4) 전장에 나서질 않다가, 도원수부에 압령되어 곤장을 맞고 분한 마음에 병마를 이끌어 칠천도에 나아갔다. 헌데 이때에 그 일기가 불순하여 해풍이 심자못 심하고 파도가 높았는데, 이를 생각하지 않고 부산으로 출진을 강행하니, 병마의 사기는 저하되고 그 피로함 또한 배가 되었다. 또한 불순한 일기에 전선의 이동을 추밀히 하지 못하여 적이 이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게 하여, 마침내 절영도 앞바다에 이르러는 힘 한번 제대로 써 보지 못하고 패전하여 칠천량으로 군을 물렸다. 원수부에서 다시 이를 질책하여 형장을 가하자 원균은 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군중에서 술을 마시기까지 하였다가 1만 주사를 모두 잃고 칠천도에서 그 참변을 당해야 했으니, 자못 장수의 명예를 크게 실추하는 행적 들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원균이 했던 당초의 호언은 장수된 자로 전략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말만 앞서 나선 것일 뿐이며,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적정을 추밀히 살피지 못한 것이니 어찌 장수의 도리를 다 했다 할 것인가? 또한 형장을 맞은 일에 분심을 다스리지 못하고 군중에서 술을 마시고 방비를 태만히 하였으니 그 역시 장수의 도리를 다 했다 하긴 어려울 것이다.

  대저 한심한 모양새가 이와 같을 진대, 어찌 군의 안전과 존속을 바라 수 있었겠는고? 이쯤을 살피고 보니 주사가 모두 전멸하여 자취를 감추었던 것은 자못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삼도수군통제사로 재기용 되다.

  이해 1월 가등청정의 도해를 시작으로 하여 왜군이 경상도를 침범하기 시작하더니, 이해 7월에 이르러는 20여만의 대군이 도해 하였으니, 이때의 국기(國氣)가 누란(累卵)의 위급한 형세에 취한 것이 매우 위험 하였다. 그에 앞서 4월에 나는 성명(聖命)이 내려 금부의 옥을 나와 원수부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5) 그러던 중에 7월 18일에 칠천도 참변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호남(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호서(충청) 수사 최호 등이 모두 전사하고, 원균 또한 참변을 면치 못 하였다는 말이었다. 오직 경상우수사 배설 만이 휘하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탈영하여 목숨을 보존했다 하였는데, 이말을 들으니 그 찢어지는 마음을 감할 길이 없어 매우 통곡하였다.

  또한 도원수 대감(권율)이 직접 숙사를 찾아와 이 일을 의논하였는데, 이때 내가 직접 수군의 실정을 살펴 대책을 강구할 것을 청하였고, 도원수 역시 흔쾌 하였다. 나는 그 길로 군관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 9명과 함께 영남수사 배설이 대기하고 있다는 하동 노량을 향하였다. 18일에 출발하여 노량에 도착한 것이 21일 이었고, 여기서 요행히 목숨을 구한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을 볼 수 있었으며, 다음 날 장계를 써 도원수부에 보냈다. 그 날에 배설을 만나게 되어 수군의 임시 통수자를 둘 수 있었다. 또한 이즈음을 기하여 원수부에서 명이 내렸는데, 나로 하여금 진주목과 협의하여 정성 등 요충지의 방비를 엄중히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23일에는 정성으로 가 민가에 숙사를 잡고 병마를 훈련하였다.

  그로부터 8일 뒤인 8월 3일, 선전관 양호가 내려와 성명(聖命)을 전하였는데, 나를 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한다는 말을 전하는 바였다. 조정의 대신들이 내 뜻을 바로 받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사세가 급박하니 어찌 다른 소리를 덧 붙일 바 있었겠는가? 이 날로부터 수군의 총령을 다시 세우고 12척의 함대는 따로 서진하게 하여 회령포에 가도록 하고, 나는 다시 원수부에서 부터 대동한 9 군관과 남해 현령 박대남, 전 수군 조방장 배홍립 등을 이끌고 정성에서 출발하여 두치, 석주관, 구례, 압록강원, 곡성, 옥과, 석곡강정, 부유창, 순천, 낙안, 보성, 군영구미 를 거쳐 회령포로 향하였다. 이 일정이 총 15일이 걸렸는데, 한시가 급한 줄을 알지마는, 수군의 남은 힘이 일천하였으므로 이렇게 하여서라도 병마를 다시 모으고 군수(軍需)를 챙겨야 했으므로 부득불 그리 한 것이다. 이 일이 헛되이 되질 않아 장편전, 총통 등을 더 구할 수 있었고, 보성의 조양창에서는 양곡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우수영에 계류하고 있던 신조전선 1척을 더 구할 수 있었으니 그 수확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3.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전장에 나서 승리하다.

  8월 7일과 15일 경에 경조(京兆)에서 성명이 내렸는데 그 내용이 자못 충격적인 것이었다.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류하여 적을 맞으라는 내용이었는데, 과연 이 말을 한 이들이 조정 대신의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또한 이는 마땅히 군무(軍務)로 방변의 일을 처리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며, 한 병과의 존폐를 결정하는 것이므로 그 것이 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비국(備局 : 비변사)의 도제조가 직접 논의를 주관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제조가 경기의 군심을 살피러 나선 사이데 비국 당상들 만이 논의하여 결정한 것이니 그 내용 뿐 아니라 절차에도 큰 문제가 많은 것이었으니, 나의 충격이 오죽 하였겠는가? 그 심회가 자못 복잡하여 과음을 하고도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였을 정도였다. 아아, 이 조무래기 같은 이들이 비국의 당상을 꿰차고 앉아서 전선의 일은 알지도 못한 채 공론을 내 뱉고 있으니 그 심회는 지금도 답답한 지경이다. 임진년의 적이 감히 경조를 경략하고도 끝내 물러간 이유가 무엇인 줄 모른단 말인가?

  나는 결국 15일 경의 성명에 계문을 보내어 수군의 전폐를 반대하는 뜻(6)을 전하니, 더 이상 그와 같은 명문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진실로 수군을 폐하는 일은 두려운 일이라 반대하기는 하였으나 벌써 군심은 동요하고, 나 역시도 확실한 승산을 세울 수 없으니 진실로 그때의 전장은 나 역시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적은 계속해서 내습을 감행하였으니 8월 28일, 9월 7일 오후와 밤, 9월 9일 등에 내습한 것이었는데, 8월의 내습에서는 아무런 전략도 생각해 내지 못하였고, 그 이후로 한 전략을 생각하였으나 매우 위험하여 크게 고심하다가 마침내 별다른 수가 없는 즉, 9월 9일에 그 전략을 택하여 군에 고지하였다. 명량에서 적을 맞서는 것이었는데, 일전에 살피기로 명량의 물길이 자못 험하여 배를 잘 젓지 못하면 그대로 뒤집히기 십상일 정도였으므로, 왜선이 이를 견디지 못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왜선이 이를 견딘다면 큰 낭패를 볼만한 계교로 진실로 기책(奇策 : 기이한 계책)이라 할만 한 것이었다. 마침내 9월 14일에 출진하여 명량으로 향하였는데 이때까지도 계교와 전황을 확신할 수 없어, 오로지 병법에 이른 두 글귀를 생각하여 마음을 다잡을 따름이었다.(7)

  마침내 16일, 적선 133척과 명량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이때의 떨리고 두려운 심정이야 인간일진대 어찌 적을 수 있었겠는가? 적은 장수 내도통총(구루지마 미치후사)이 이끄는 30여 척으로 선봉을 삼아 울돌목을 넘었다. 이들이 모두 우리 배들을 포위하고 서니 장수들 스스로도 두려움을 느껴 적을 피할 꾀를 내기에 바빴으니 우수사인 김억추 등의 전서는 이미 2마장(약 950m) 바깥으로 물러나 아득하게 보였으며, 다른 제장들도 각기 1마장 가까이 물러서 있었다. 선두에 남은 것은 오직 영선(營船 : 통제영선) 기함(旗艦) 뿐이었다. 적선이 사권(射圈 : 사격권)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활과 총통을 매우 쏘았는데, 마치 빗발이 치는 듯하였다. 적선 역시 조총과 화전을 발사하니 진실로 배 위에서 난전을 겪었으며, 일부는 배를 붙여 도선(배를 건넘)하여 도륙하기도 하였다. 나도 직접 칼을 들고 적과 맞섰는데, 적은 물러서는 듯 하다가도 겹겹의 포위를 풀고 있지 아니하니 진실로 형세가 어려워 그 앞을 예측할 수 없었다.

  김억추 등이 이끄는 전선 마저 멀리 있어 감히 전세를 뒤집을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였던지라, 그 상황의 두려움이야 오죽하였을까? 초요기(招搖旗 : 장수를 부르는 신호)를 올려 중군장 김응함을 불렀다. 중군장은 본래 총령하는 이를 보좌하고 명령을 바로 전달하는 기능을 하는 자리이거늘, 그런 자리에 있는 자 역시 겁을 먹고 뒤로 물러 나 있으니 한심하였으나, 나 역시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었을 지경이었다. 이때에 초요기를 보았던지, 거제현령 안위도 상선(上船 : 기함)으로 왔다. 나는 두 사람을 크게 질타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군법으로 죽고 싶으냐? 상선이 앞서 적함과 맞서는데 감히 그 대장을 구하지 않은 죄는 어찌 씻으려 하느냐!" 하였다. 그제사 김응함, 안위 등이 적선과 맞섰으나, 그 사세가 쉬이 변하지는 못하였다.

  이때에 기함에는 항왜(降倭 : 항복한 왜군)로 준사(俊沙)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때 마침 적장 내도통총(來島通總 : 쿠루시마 미치후사)이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발견하여 군에 알리니 즉시 이를 건져내어 효수하고 선두에 높이 달았다. 적들이 이를 보고 겁에 질려 그제서야 조금 숨을 돌릴 지경이 되었다. 김억추 등은 상황이 이에 놓이고 나서야 슬금슬금 전장에 들어섰다. 어찌 화가 나지 않았겠는가? 다만, 상한 병마를 돌리기 어렵고, 전세가 워낙에 위급하였던 즉, 나 조차도 감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오죽하였겠는가?

  결국 이날 오후에 적선이 명량에서 등을 돌리니 이를 추격하여 격파하니 이날 적선 123척이 크게 상하였고, 겨우 10여척이 온전히 살아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기고 나서도 그 두려운 마음이 쉬이 가시지 않았으니, 진실로 명량에서의 전투는 천행이라 할 것이다.

                                                                                                                                                               

 주1) 원균이 주사(舟師)의 통제사(統制使)에 임명되어, 임지(任地)로 가는 길에, 중부(仲父)이신 동암공(東巖公 : 안중홍.)에게 들러 안부를 물은 바가 있었다. 이때에 원균이 말하기를, "나는 통제사가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오로지 순신에게 설욕한 것을 상쾌히 여길 따름입니다." 하였다. 동암공께서 "영공(令公 : 장군)이 마음을 다하여 적을 깨뜨리고 그 전공이 능히 순신의 위에 올랐을 때 설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순신과 통제사를 교체한 것을 가지고 어찌 설욕했다고 말할 수 있겠소?"라 반문하니, 균이 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적을 만났을 때, 그 거리가 멀면 편전을 쏘고, 가까우면 장전을 쏘거나 칼로 후려칠 것이며, 칼이 부러지면 몸으로 싸워 적을 칠 터이니 이기지 않을 리 없습니다." 하니, 동암공께서 "대장이 칼을 쓰고 몸으로 싸운다니 이게 옳은 일인가?" 하였다. 원균이 떠나자 동암공께서 나(안방준)에게 말씀하시기를, "원균의 사람 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틀렸다. 옛적에 조괄이 기겁하였다 하나, 반드시 저러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 후 장탄하였다. 남역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서 팔을 걷어붙이고 분개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 은봉 안방준 著『은봉전서』권8 백사론임진제장사변(白沙論壬辰諸將士辨) 中

  주2) … 당초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순신의 법제를 모두 변경하고, 이순신이 신임하였던 장병들은 모두 내쫓아 버렸다. 또한 이영남이 전날 원균이 패전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니 군사들의 마음은 그를 원망하고 분해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에 건물을 지어 운주당이라 이름하고 밤낮을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비록 졸병이라 하더라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와서 말하게 하여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게 하였으며, 늘 싸움을 하려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되 뒤에야 싸운 까닭으로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애첩을 데려다 운주당에 들이고, 울타리를 높여 안팎을 막아 놓으니, 장수로부터 병졸에 이르기까지 그 낯을 보기 어려웠다. 그는 또 술을 좋아하여 날마다 주사와 성내는 일을 일삼았고, 형벌을 가하는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는 비밀히 수군거려 말하기를 "만일 왜적을 만날 것 같으면 오직 도망하는 수 뿐이다."라 하며, 장병이 모두 그를 비웃었다. 또한 다시 품의하거나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므로, 호령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징비록』권2

 주3) (상략) … 임진년 초에 적의 육군은 몇 달 사이에 평양을 침범했으나, 해구(海寇 : 해적, 왜군을 말함.)는 여러 해 동안 전패(戰敗)를 하였으므로 끝내 남해 이서에는 이르지 못 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위무는 오직 수군 뿐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배로 영등포 앞바다로 나아가 몰래 가덕의 뒤에 정박한 후, 경쾌선을 선발하여 삼삼 오오 열을 지어 절영도 밖에서 수군의 위력을 빛내고, 혹은 1백 척, 2백 척으로 큰 바다에서 시위를 하면, 청정(淸正 : 가토 기요마사, 가등청정)은 원래 수전을 하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겁을 내어 반드시 군대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엎드려 조정에 원컨대, 수군으로 바다 밖에서 마저 싸우게 하여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하면, 반드시 환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신의 장담이 아니온 즉, 신은 전에 바다를 지켜 이 일에 대해 익숙하므로 지금 감히 침묵만 하고 있을수 없어 탑전(왕이 있는 곳, 정청. 여기서는 수도를 말함)을 향해 우러러 외치는 바입니다. - 『宣祖實錄』84권 선조 30년(1597년 정유/명 만력 25년) 1월 22일(계축) 3번째 기사

  주4) 신이 통제사로 부임한 후 가덕진, 안골포, 죽도(김해강 서안에 위치하며 김해읍까지는 육로로 5.5km)를 출입하는 적들은 부산의 적과 서로 긴밀히 연계를 짓고 있으나, 그 수는 불과 수만 명에 지나지 않으므로 적의 병력은 고립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세력도 약하다 할 것입니다. 그중 안골과 가덕의 적은 3~4천명 미만이므로 그 세력이 몹시 외로운데, 만일 육군이 이들을 몰아 내면 수군이 이를 바다에서 섬멸할 수 있으며, 그런 후에 파죽지세로 장수포(장림포) 등지로 진격하여 뒤를 돌아볼 염려 없이 다대, 서평, 부산 등지로 진격, 매일 병위를 빛내 이 지역을 다시 되 찾을 수 있습니다. … (하략) - 『宣祖實錄』87권 선조 30년(1597년 정유/명 만력 25년) 4월 19일(기묘) 5번째 기사

  주5) 많이들 백의종군이 병졸의 신분으로 강등되어 병졸과 동일한 노역을 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백의종군은 본래 보직을 해제하고, 대기 발령 상태로 좌천시키는 형벌이다. 일종의 좌천형과 비슷한 것으로 실제 법정 형벌은 아니다. 계급은 유지한 상태에서 보직만 해제되는 이 형벌은, 보직이 해제 되었을 뿐, 해당 직책의 업무는 계속 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며, 그렇기 때문에 실록에 백의종군 사항으로 기록된 이들이 녹봉을 받고(물론 삭감된 녹봉이다.), 하급관원을 부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순신 역시 조산만호에서 파직되어 백의종군을 하였으나, 시전부락 전투(그것이 꼭 420년 전인 무자년이다.)에서 우화열장을 맡아 참전하였던 기록이 있으며, 정유재란 당시의 백의종군 때 역시 개인 숙사를 제공 받았다.(이 얘기는 일전에 불멸의 이순신 방영 당시 안티 불멸 짓거리를 하면서 그때 같이 활동하던 분들께 들은 카더라 통신인지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혀 둠.)

  주6)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남과 호서를 직접 범하지 못한 까닭은 우리 수군이 적 수군의 진격을 가로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 전선 12척이 남아 있으니(尙有十二), 사력으로 적을 맞서 사우면 능히 적을 막을 수 있습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한다면 곧 적이 크게 바라고 있는 것이니, 적 수군은 거침없이 수로를 나서 호남, 호서를 경략, 육군과 병진하여 한강에 이를 경조를 위협할 것이니, 진실로 이리 되는 것은 신 등이 크게 두려워 하는 일입니다.
  설령 전선의 수가 적다 하여도, 미신(微臣 : 미거한 신하. 신하가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말)이 죽지 않는 한(微臣不死/舜臣不死), 적이 감히 우리 주사를 깔볼 수 없을 것입니다. - 이분 著 『행록』 中

  주7) 반드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
         한 병마가 길목을 지키면 능히 천 명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이걸 올릴까 말까 하다가 결국 올렸다. 더불어 별로 의견을 전하는 글도 아니고 명량해전에 대한 상황 전달 기능밖에 없어서 카테고리 정하기도 애매하더라. 결국 한국사에 끼워넣어 버렸다. 생각해 보니 얼음집에서 이렇게 긴 한국사 포스팅은 처음하는 거로군.(네이버 블로그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덧글

  • 耿君 2008/04/30 15:59 #

    내도통총이 누군가 했더니 쿠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군요 ^^
  • 푸른화염 2008/04/30 18:21 #

    耿君//예, 괄호 열고 한문이랑 다 써 놓을까 했는데.. 귀차니즘이..... 근데 이렇게 하셨으니.. 마땅히 옮기는 것이 도리겠지요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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