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리뷰] 깊은 내공의 폭포수 같은 소리 - 박동진(소리), 김동준(북), 적벽가(赤壁歌) / CJ Music └예부藝部


※ 블로그는 나의 자서전을 편집해 두는 곳이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런저런 포스팅을 생각해 보던 차에 틈틈히 음반에 대한 리뷰라도 적어 올릴 생각이다. 물론 내가 전문적으로 파고들 수 있고, 동시에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많이 듣게 되는 국악 음반이나 클래식 - 그중에서도 교향곡들 - 쪽으로 한번 올려보려고 한다.


  1. 현존하는 판소리 다섯 바탕 중 가장 어려운 레퍼토리를 꼽으라면 흔히들 적벽가를 이야기한다. 목을 상하기도 쉽고, 그만큼 좋은 소리로 극의 내용을 묘사하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옛 명창들 중 대 부분은 그 장기로써 적벽가의 한 대목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대개 적벽가를 할 줄 아는 소리꾼들은 다른 바탕소리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소위 근대 5명창으로 불리는 인물들은 대부분 다른 바탕소리도 잘했지만, 적벽가 한 대목, 혹은 전 바탕에 뛰어난 경우가 많았다. 쑥대머리로 유명한 임방울 역시 적벽가로 이름을 날린 명창 중 한 사람이다.

  2. 1962년 무형문화재 제도가 시작된 이후, 여러 명창들은 5바탕 가운데 1바탕의 보유자로서 인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지정된 1세대 적벽가 예능보유자들은 동편제의 박봉술, 박동진, 서편제의 한승호였다. 요즘에는 박봉술 선생의 적벽가가 가장 널리 성창되고 있는 버전이지만, 1세대 예능보유자 가운데 적벽가로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박동진이었다. 71년, 그가 처음 완창했던 그의 적벽가는 무려 5시간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다.(다른 이들의 적벽가는 평균 2시간 30분~3시간이다.) 박동진은 청년기에 한 차례 목을 잃은 적이 있었다. 청이 막히고 중음, 고음, 저음이 모두 나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로 인해 그는 목을 되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폭포수 같이 통큰 공력을 갖추게 되었다.

  3. 박동진은 여러 스승을 모시고 그 스승의 소리를 그대로 답습하기 보다는 스승의 유형을 받아서 그 유형을 자신의 틀로 재창조하는 소리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5시간 안팎에 이르는 정정렬의 춘향가 역시, 그에게 와서는 8시간으로 변한 것이다. 동편제, 서편제는 물론, 중고제 소리에도 두루 능하였는데, 중고제 소리로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소리와 청송 심씨 심화영 명창의 소리, 단 두 유파만 남아 있는데, 그나마 이 두 소리가 모두 판이하기 때문에 여러가지 측면에서 그의 중고제적 측면은 많이 연구되어야 할 부분이다.

  4. 그는 사설을 짜는 방식이 굉장히 기막히다. 대개 이야기의 흐름을 먼저 짜 두고, 그것에 따라 장단을 배치하는 것이다. 그때그때 시김새에 따라서 부르는 양상이 달라질 수 있는 여지가 된다. 이것은 장단을 기본 얼개로 해서 거기에 사설을 맞추는 동초 김연수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이다.

  5. 그의 적벽가는 동편제 계열의 소리라 하지만, 널리 성창되는 송판 계열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의 적벽가는 정춘풍 -> 박기홍 -> 조학진에게로 이어지는 소리인데, 송흥록, 송광록 계열의 그것과 사승 관계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박동진의 증언에 따르면 정춘풍이 양반 광대로서 소리의 독특한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6. 이 녹음은 1973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박동진이 고수 김동준과 함께 이듬해인 1974년 녹음한 것으로 그 전성기 시절의 성음을 여과없이 들을 수 있는 자료다. 박동진의 적벽가 전판 녹음은 이 녹음이 유일한 것인데, 사실 몇가지 연행본과 비교를 해 보면, 내용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군사설움타령의 구성인데 이 녹음에서 박동진은 부모설움(진양, 고당상-), 자식설움(중중모리, 너 내 설움을 들어라), 처자설움(중모리, 너 내 설움을 들어보아라), 노랑돈 설움(아니리, 한군데서 벙거지가 우는디 / 중중모리, 내 설움을 들어 보시오) 등 4가지로 이어나가고 있는데 - 이 다음은 군사 호기, 싸움타령이 이어진다. - 실제로 그의 연행본을 보면 이 사이에 초야설움이 들어가 있고, 1988년 일부 녹음된 적벽가에서는 초야설움이 추가된 것으로 그리고 있는데, 어째서 이 녹음에만 이러한 구성으로 녹음하였는지 알 수 없다.

  7. 대체적으로 박동진의 특징은 매우 극적인 부분을 잘 소화해 낸다는 것에 있는데, 이 녹음에서도 그러한 특성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적벽화전 부분은 누구의 것도 따르지 못할 만큼 장대하고 굳센 맛이 있다. 흔히 한승호의 적벽화전이 매우 긴박하고 비장미가 넘쳐 일품이라 하는데, 한승호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로 일품의 위치에 있는 것이 박동진의 적벽화전 부분이다. 박동진의 적벽가는 삼군을 호령하는 장수의 호령과 전투 중에 이어지는 파괴적인 소리들을 자신의 풍부한 성량으로 그려내고 있다.

  8. 그의 판소리에는 대개 재미있는 육담과 재담이 섞여 있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 녹음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조금 결여되어 나타나고 있고, 김동준의 저 유명한 추임새 또한 조금 낮게 녹음이 되어 있다는 것이 흠이다. -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김동준의 성음이 잘 들리지 않는다. 아마 창자의 소리를 위하여 북소리를 조금 작고 낮게 녹음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 그와 함께 이 녹음을 수행한 고수 김동준은 1980년대까지 한국 국악계를 풍미하였던 당대의 명고수로 김득수, 김명환과 함께 소위 '명고 3김'의 시대를 열었던 사람이다. 보통 창자의 왼쪽 옆에서 창자를 바라보고 앉는 것이 고수, 창자의 위치인데 대개 이럴 경우 왼손이 객석에 보이게 되어 있다. 김동준은 왼손잡이 고수로서 왼손으로 채를 잡고 치는데, 그러다보니 화려한 채가락이나 앉은사위에 맞먹는 손 놀림이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그의 무대는 굉장히 극적이었다고 전한다. 3김 중 가장 장단이 화려하고 추임새 또한 흥겨웠던 것으로 유명하였다. 본래 판소리를 한 적이 있기 때문에, 김득수와 함께 소릿속을 잘 알아주는 명고수로 유명하였다.

  9. 김동준과 박동진의 조합은 김득수, 박동진의 조합 못지 않은 명콤비로서의 호흡을 보여준다. 박동진이 특유의 풍부한 호흡으로 가락을 주무르는데 김동준은 그런 소리꾼의 소리를 아주 꿋꿋하게 잡아주고 화려한 잔가락을 집어넣어 한층 풍부한 북 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실황에 나타나는 그런 느낌이 조금 적은 것을 제외하면 들을 가치가 충분한 음반으로 생각된다.

※ 이 음반은 본래 유니버어셜레코드(음반번호 : 80720~80725)의 이름으로 LP박스물로 출반된 것을 시작으로, 1988년, 현대음반주식회사(음반번호 : HDT-018~022)의 이름으로 카세트 테이프(5장)로 재출반 되었다. 이 음반은 LP반을 복각, 리마스터링하여 4장의 CD로 만든 것이다. CD판은 사운드스페이스에서 출반되었다가 최근 CJ Music의 이름으로 재출반되었는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것은 CJ Music의 재출반 음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