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뉴스가 떴다. 첫번째 줄의 내용이 인상적이다. '한국에는 임금이나 황제가 쓰던 익선관이 없습니다.' 정말인가? 박물관에서 언뜻 본것도 같은데? 아닌가? 그럼 그것들은 다 일본이 가져간건가? 저런 나쁜 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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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얘기가 전개된다면 헛소리.
생활문화재는 쉽게 전승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물려 받아 쓰는 경우도 있고, 상례(喪禮) 혹은 무속적인 이유로 망자의 물건을 태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생활품이라는 것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남기도 어려울 밖에. 때문에 먼 시기의 생활문화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가구나 소품류는 남아 있을 뿐이지 복식 류는 더더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 나라에 그런 것들이 아주 안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직접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의복류와 염습의(殮襲衣)로 사용된 매장 복식, 사찰에 기증된 복장(伏藏) 복식 등 수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 관모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조선 초나 고려시대의 것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 중기에 해당하는 17세기 전후의 유물들
이나 18세기, 19세기의 유물 등 다양한 것들이 남아 있다. 익선관? 당연히 있다.



<사진 1, 2> 전(傳) 고종 익선관
전(傳)
고종 익선관이다. 현재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1979년에 중요민속자료 제44호로 지정된 유물이다. 당장 세종대학교 박물관 홈페이지만 둘러보아도 (박물관 홈페이지는 상당히 빈약하지만) 소장유물 가운데 익선관 하나가 올라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 물건이다.(클릭 : 사진 상태는 썩 좋지 못하다.) 사진의 출처가 되는『문화재대관 - 중요민속자료 ② 복식·자수편』에는 더불어 이런 설명도 있다.

익선관은 본 유물 외에도 창덕궁에 3점의 익선관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북청색, 흑색, 자색 각 1점씩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태가 양호한 영왕의 자적색 익선관도 함께 소장되어 있는데 고종의 익선관과 흡사한 형태이다.

<사진 2> 익선관
현재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옛 창덕궁 보관 익선관 3점을 찾아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현재 찾을 수가 없고, 대신 다른 도록에 실린 사진을 가져왔다. 오륜대한국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었다는 익선관이다. 전 고종 익선관보다 상태가 조금 안좋아 보이지만, 그건 도록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넘어가고, 전체적인 형태나 색감 등은 비슷해 보인다.

<사진 4> 영친왕 익선관
역시 위의 익선관들과 전체적인 형태가 유사하다. 특히 오륜대박물관 소장의 물건과 아주 유사하게 생겼는데, 면사의 상태에 다소 차이가 있다. 이것은 지난 2009년 지정된 영친왕의 익선관이다. 영친왕이 누구인가? 주장하는 바대로 따지자면 황사손을 자임하는 이원 씨의 할아버지가 된다. 버젓이 (의붓이긴 하지만) 자기 할아버지의 유물까지 존재하는 익선관이 한국에 없다니? 이걸 포함, 저 위의 오륜대박물관 소장 익선관과 고궁박물관소장 익선관 3기를 개별로 처리하면 무려 6개의 익선관 유물이 존재하는 것이고, 그걸 제하고도 2~3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익선관이 없어? 원 어이가 없어서.
하긴, 이들의 정신나간 헛소리가 이 뿐이 아니기는 하다.
황사손을 자칭하는 이원 씨는 어느 매체 인터뷰에서 '살아 있는 궁이 되려면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낙선재에서 외국인과 학생들을 만나 얘기하면 얼마나 생생하겠나?' 라는 소리를 한 적이 있다. 말은 번지르르 하지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생생한 해설을 해 줄테니까 내가 낙선재에서 살게끔 하라.'는 것이다. 내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낙선재 활용방안을 문화재청과 이야기 했다는 얘기가 바로 뒤에 나오는 지경이다. 아무리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생활공간은, 주거 공간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생활이 보장되어야 하는 곳이므로 개방할 수가 없다. 왜 순종비 윤씨가, 이방자가, 덕혜옹주가 살았던 시절의 낙선재는 개방되지 못했는가? 당연하다. 그들의 생활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황사손이 산다고 달라질 게 있을 것 같은가? 천만에.
영국의 버킹엄 궁전은 영국 군주의 공식 거처로 사용되지만 7~8월에는 일반인 입장을 허가한다. 그러나 7~8월이면 극히 짧은 기간이며 그 개방 범위는 현재 알려진 것이 없다.(제현들 께서는 이에 대해서 아시는 바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문화재에 직접 기거하면서 생생한 역사의 전달-이라니……. 차라리 그러한 의도라면 '감독하게 건물 내부를 직접 둘러볼 수 있도록' 하는 장치와 '문화재 해설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는' 장치를 생각하는게 이성적이다.(무려 이런 사람이 PD출신이다.) '생생한 역사의 설명을 위해 내가 사적 유용하겠다.'니- 이건 말인지 막걸린지.
아니 애초에 영국까지 갈 것도 없다. 삼청동~안국동 등 북촌 일대에 있는 가옥 가운데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가옥이 몇개 있다. 그 가운데 안국동 윤보선가(정독도서관 가는 길에 있는 바로 그것)에는 아직도 윤보선 대통령의 유족들이 산다고 알고 있다. 때문에 개방을 하지 않는다. 특별 개방식으로 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하는데 '특별 개방'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의 제정신 아닌 발언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환구단 터에 건물이 들어섰으니 복원을 못하고 환구단을 서울광장에 세우려고 했다는 소리. 애초에 '원구단'을 '환구단'이라고 우기는 것은 그렇다 치자. 아니 전제권력의 산물인 대한제국의 환구단을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에, 그것도 '시청 광장'에 재건한다는게 있을 법한 소리인가? 이걸 기득권이 반대한다고? 천만에, 찬성하는 측을 오히려 정신병자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무조건적인 문화재 환수. 소송을 걸겠다 어쩐다- 애초에 유출 문화재의 유출 경로가 확실한게 몇이나 될 것 같은가? 물론 기사 속 투구나 익선관들은 오구라컬렉션의 일부로 보고 있고, 이 컬렉션이 공식적 경로(매매라거나 선물이라거나)가 아닌 비공식적 경로로 유출 된것은 분명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재 실태가 어떤가? 있는 문화재도 제대로 관리 못하고 있는 실정에다가 - 10여년 째 '수장고 소장 목록 정리 시작중'인 국립중앙박물관이라거나 - 유물 관리는 개판 오분전 - 심지어 고종 어진 중 하나는 밑이 울었고, 경기전 제향 때 찢어먹은 태조 어진은 인사동에서 싼맛에 땜질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이 경기전 태조 어진은 대동종약원이 한 짓이구나. 에헤라디야. 에라이... - , 그런데 여기로 들여오자고? '민족적 자존심'을 위해서? 천만에. 민족? 그래 중요하지. 그러나 '문화재'는 문화재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자존심의 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출 문화재 가운데 상당수는 어찌 되었던 '매매'와 '증여'라는 방식을 통해 나온 것도 있다. 이 경우는 법적으로 (상당히 분통터지지만) 문제가 거의 없다.(모르지, 난 법학도가 아니라서. 꼬투리 잡으면 나올지도.) 이걸 소송을 하겠다고?
싫다싫다 하니 이젠 별 기도 안 차는 소리들을 하고 있다. 황사손 이하 대한황실문화원은 제발 정신들 차려라. "아, 우리 황실이 무능력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픈 역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라고? "고종 황제는 이러한 개혁으로 우리나라를 구하려 하였으나 외세의 핍박으로 실패했다."는 식으로 설명하시는 분들이 누구시더라? 가당찮은 헛소리 말고 제발 '마음에서 우러나는' 반성을 좀 하는 것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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